안성에 점심때쯤 도착했는데, 뵙기로 한 동네 할머니가 장에 가고 안 계셨다.
오후 다섯 시나 되어야 오신다기에
할머니를 소개시켜 주기로 한 판화가의 작업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.
그날 처음 만나 실례인 건 알지만 달리 갈 데가 없었다.
집을 겸한 작업실은 야트막한 산과 맞닿아 있었다.
작업실 분위기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.
평화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, 어쩐지 압도 당하는 느낌이었다.
함부로 기웃거리거나 작품에 대해 말을 꺼내면 안될 것 같았다.
할머니가 오실 때까지 네 시간이나 남았다.
판화가는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나에게 라면을 먹겠느냐고 물었다.
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고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.
냄비채 내 준 라면을 국물까지 다 먹었다.
내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자, 설거지는 원래 안 한다면서 냄비를 치워 버렸다.
그러고는 믹스커피를 타 주었다.
판화가는 여전히 불편한 표정이었다.
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점점 편해졌다.
마당에는 크고 순한 개 두 마리가 있었다. 한 마리는 열다섯 살, 또 한 마리는 일곱 살.
까만 고양이도 있었다. 나한테 곁을 주지는 않았지만 많이 경계하지도 않았다.
내가 개를 쓰다듬는 걸 본 판화가가 냉장고에서 분홍 소세지를 꺼내 주었다.
조금씩 뜯어서 주면 된다고 했다.
라면을 먹고, 커피를 마시고, 개한테 소세지를 먹였어도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다.
나 때문에 판화가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혼자 동네 구경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.
그러자 나를 보고 팔을 위아래로 휘저었는데, 그 모습이 그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애매했다.
"네? 가라고요? 가지 말라고요?"
판화가는 기다리라고 하더니 개 목줄을 챙겼다.
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말고 있는 고양이를 깨웠다.
나는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, 판화가는 나머지 한 마리를 데리고 나섰다.
고양이는 십 미터쯤 뒤에서 조심조심 따라왔다.
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는데, 판화가가 휘이 휘파람을 불면 어디선가 달려왔다.
산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.
나무들도 아직은 잎을 다 틔우지 않았다.
판화가와 개 두 마리와 고양이와 함께 모르는 산길을 걷는다.
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.
내려오는 길에 활짝 핀 산벚나무를 보았다.
판화가가 말했다.
"이상하다. 이 산에 벚나무는 이거 하나밖에 없는 거 같은데. 안 그래요?"
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.
산을 통틀어 한 그루밖에 없는 벚나무라.
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카메라를 작업실에 놓고 나왔다.
아니다. 나는 벚나무를 찍고 싶은 게 아니었다.
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 전부를 옮겨 놓고 싶었다.
다음날도, 그 다음날도, 또 그 다음날도.
나는 그날을 자꾸 자꾸 떠올린다.